PoC는 됐다. 오라클이 없으면 그 다음은 없다
블록체인 도입을 검토하는 금융기관이 반복적으로 멈추는 지점이 있다. 기술 문제가 아니다.
2026년 1월, 전자증권법과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토큰증권이 법적으로 유효한 증권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2027년 초부터 생긴다.
지금은 그 사이 구간이다. 법은 통과됐고, 시행은 아직이다.
이 구간에서 많은 팀이 PoC를 마치고 다음 단계를 준비 중이다. 그런데 준비의 방향이 대부분 같은 곳에서 멈춘다. 스마트 컨트랙트 설계, 체인 선택, 커스터디 구조. 여기까지는 논의가 된다.
논의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이 시스템이 지금 운영 중인 기존 시스템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블록체인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것들
토큰증권 인프라를 실제로 운영한다고 가정해보자.
현재 채권 가격은 어디서 오는가. 이 투자자가 적격 요건을 갖췄는지는 누가 확인하는가. 수익분배는 어떤 조건에서 자동으로 실행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어떤 것도 블록체인 위에 없다. 전부 기관이 수십 년째 운영해온 시스템 안에 있다.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결정론적 폐쇄 시스템이다. 모든 노드가 동일한 코드를 동일한 데이터에 실행해야 한다. 외부 데이터를 자체적으로 가져올 수 없다. 스마트 컨트랙트가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어도, 외부에서 데이터가 들어오지 않으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오라클은 이 간격을 메우는 컴포넌트다. 기존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가져오고, 암호학적 서명으로 진위를 증명하고, 스마트 컨트랙트가 신뢰할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한다.
이것이 미들웨어 문제처럼 들린다면, 실제로 운영해본 사례를 보는 것이 빠르다.
홍콩이 먼저 겪은 것
홍콩은 정부 토큰화 채권을 실제 발행까지 끌고 간 대표적 선행 사례다. 2023년 2월, 홍콩 정부는 세계 최초의 정부 토큰화 녹색채권을 발행했고, Project Evergreen에서 발행일 T+1 정산 구조를 구현했다.
그 직후 HKMA가 낸 보고서(Bond Tokenisation in Hong Kong - HKMA 2023.08) 에 이런 문장이 있다.
"currently there is no connectivity between existing custody systems and the digital platform. Reconciliations between the digital platform and custody system records are done manually."
“현재 기존 커스터디 시스템과 디지털 플랫폼 사이에 연결이 없다. 두 시스템 간의 대사(reconciliation)는 수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최초 프로덕션 배포. 수동 대사.
온체인 정산 기록은 남았지만, 그 기록을 기존 커스터디 시스템과 맞추는 작업은 담당자가 매일 수작업으로 했다는 뜻이다.
2025년, HKMA가 113개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DLT 도입 장벽을 조사했고, 이 결과 65%가 “기존 시스템과의 통합”을 가장 큰 과제로 꼽았다. 보안(62%)보다 높고, 규제 불확실성(53%)보다 높다.
Oracle 연동 공식 언급 (p4):
“enhanced connectivity between on-chain and off-chain interactions via oracles, which play an important role in connecting digital and traditional ecosystems”
(HKMA, Distributed Ledger Technology in the Financial Sector, p.4)
홍콩은 규제가 먼저 정비된 곳이다. 규제가 정비된 이후에도 기존 시스템 통합이 최대 장벽으로 남았다는 것이 이 데이터의 의미다.
한국에서 오라클이 없으면 막히는 세 지점
2027년 전자증권법 시행 이후 토큰증권 인프라를 실제로 운영하려면, 오라클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지점이 세 곳 있다.
첫째, 투자자 적격성 집행이다. 증권형 토큰이 이체될 때, 수신 주소가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췄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이 검증은 기관의 KYC 시스템에서 일어난다. 체인 레벨의 이체 제한을 실제로 집행하려면, 그 결과가 이체가 실행되는 순간 스마트 컨트랙트 안에 있어야 한다. 오라클이 없으면 집행이 오프체인에서만 일어나고, 온체인 기록의 신뢰 모델이 깨진다.
둘째, 가격 산정이다. 토큰화 채권과 RWA 토큰의 가격은 기존 금융 시스템의 데이터를 참조한다. 이 데이터가 온체인 정산 로직에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주입되지 않으면, 정산 기록은 남지만 그 정산이 올바른 가격에 일어났다는 증명이 없다. 감사 관점에서 이것은 기록이 있지만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다.
셋째, 정산 자동화다. 수익분배, 이자 지급, 쿠폰 정산은 외부 조건에 바인딩된다. 기준금리 변동, 정해진 지급일, 기초 자산 가격의 임계값 도달. 스마트 컨트랙트는 이 조건들을 스스로 알 수 없다. 오라클이 전달하지 않으면, 자동화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담당자가 수동으로 트리거를 넣는 구조가 된다.
세 지점 모두 현재 주요 오라클 제공자들이 기관용 완성품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시장 가격 피드는 Chainlink 같은 탈중앙화 오라클로 커버된다. 그러나 KYC 상태나 규제 플래그처럼 단일 권위 있는 소스에서만 오는 데이터는 아직 기관별 시스템/규제 요건에 맞춘 설계가 필요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지금 이 구간에서 해야 할 것
법이 시행되고 나서 오라클 설계를 시작하면 늦다. 오라클 레이어는 스마트 컨트랙트 설계, 커스터디 구조, 기존 시스템 연동과 동시에 설계되어야 한다. 나중에 붙이는 것이 구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지금 이 구간에서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다.
어떤 데이터가 온체인에 들어와야 하는가. 정산에 필요한 데이터를 목록으로 만들고, 각각이 어떤 시스템에서 오는지, 누가 권위 있는 소스인지 정의해야 한다.
감사 추적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규제 당국은 모든 정산의 모든 입력이 기록되고 검증 가능하기를 요구한다. 오라클 데이터의 서명과 타임스탬프가 이 요건을 충족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설계에 포함되어야 한다.
기존 시스템과의 자동 동기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홍콩 사례의 수동 reconciliation 문제가 여기서 온다. 온체인 기록과 기존 시스템 기록이 자동으로 동기화되지 않으면, 운영팀이 매일 두 시스템을 수작업으로 맞춰야 한다.
누가 오라클 비용을 소유하는가. 오라클 인프라는 운영 비용이 발생한다. 이것이 자본 지출인지 운영 비용인지 정리되지 않으면, 법 시행 시점에 예산 논쟁으로 일정이 밀린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가져가야 할 것
PoC 검토를 시작하는 팀이라면 스마트 컨트랙트 설계와 동시에 오라클 레이어를 설계해야 한다. 체인 선택, 커스터디 구조를 논의하는 시점에 “기존 시스템에서 어떤 데이터가 온체인에 들어와야 하는가”가 함께 정의되어야 한다.
이미 PoC를 마친 팀이라면 지금 당장 기존 시스템 연동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가격 데이터는 어디서 오는가. KYC 상태는 누가 권위 있는 소스인가. 정산 트리거는 어떤 조건에서 발동되는가. 이 목록이 없으면 오라클 설계가 시작되지 않는다.
2027년 시행 시점에 이것이 없으면, 법적 장치가 생겨도 운영팀이 수작업으로 채워 넣게 된다. 홍콩이 그랬던 것처럼.
B-Harvest에서는 블록체인 인프라를 개발하고, 운영합니다. 저는 Ethereum과 Polygon 메인넷에서 Chainlink 오라클 노드를 직접 운영했고, 현재 기관 블록체인 인프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내용은 개인 의견입니다.



